생존 소설 아카이브 31회-그 남자의 하루 제1화 : 언더커버



첫눈이 내렸다. 오후부터 내린 눈발은 어스름한 저녁이 되어도 그치질 않고 도심에 쌓여갔다. 부산 서면의 유흥가 거리는 하얗게 뒤덮은 건물 주변을 무지갯빛으로 염색했다. 어둠을 밝히는 불빛들은 손님을 마냥 유혹하는 요정의 손짓처럼 현란한 광선을 유감없이 뿜어댔다.

 

서두르지 말자...!’

 

생각에 젖은 이강철은 골목 끝에서 담배 연기를 지독하게 뿜으며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른다섯의 나이, 경찰청 경위 계급장은 이미 옷장 깊숙이 감춰둔 지 오래였다. 지금 그의 목과 팔을 감싸고 있는 것은 특수 잉크로 새긴 용머리 문신들이었다. 누가 봐도 혐오감이 물씬 나는, 그러나 완벽하게 계산된 위장한 무늬였다.

 

상하이 늑대 작전...’

 

작전명을 속으로 되뇌며 이강철은 담배꽁초를 눈 위에 떨어뜨렸다.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작은 연기가 올라왔다.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하는 방칠두. 조폭 두목인 그 남자를 잡기 위해 이강철은 오늘부터 요리사가 되기로 임무를 부여받았다. 손목시계를 곁눈질한 그는 파란빛으로 번진 일식집 출입구에 눈길을 보냈다.

 

잘 돼야 할 텐데...’

 

바람이 불어와 눈발을 더욱 세차게 몰아쳤다. 이강철은 코트 깃을 세우며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의 목표는 골목 안쪽에 자리한 일본식 식당을 운영하는 미치코 사장을 만나는 것. 오늘 밤, 성공한다면 그곳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일본어로 미치코라는 간판이 걸린 식당 앞에서 이강철은 잠시 멈춰 섰다. 목재로 만든 전통적인 일본식 외관이 주변의 화려한 네온사인들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내부는 차분하고 정갈했다.

 

...!!”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제부터는 이강철 경위가 아니라, 일자리를 찾는 떠돌이 요리사 이상철이었다. 사기꾼처럼 본명을 사용하지 않는 언더커버는 외모도 위장했다. 팔뚝의 용머리 문신이 옷깃 사이로 삐죽 보이도록 조정하고, 거친 표정을 지으며 식당 문을 슥 밀고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카운터 뒤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고개를 들어 이강철을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모아 낮은 위치에서 단정히 묶은 로우 포니테일을 한 그녀는 일본인 특유의 단정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녀가 바로 미치코 사장이었다.

 

주방장 자리 구한다고 전화한 사람입니다.”

 

이강철의 목소리는 의도적으로 거칠게 다듬어져 있었다. 미치코는 그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문신, 거친 몸짓, 날카로운 눈빛. 모든 것이 계산되어 있었다. 미치코의 얼굴에는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눈썹이 살짝 올라간 그녀는 경계심 어린 시선으로 이강철을 관찰했다. 다년간 사업을 해온 여성의 신중함이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이상철입니다.”

요리 경험은?”

이것저것 해봤습니다. 한식, 중식, 일식... 손님이 원하는 건 거의 만들 수 있어요.”

 

상대의 표정을 뜯어 본 미치코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그녀는 떠돌이 부류의 사람을 많이 봐온 경험자였다. 겉으로는 거칠어 보이지만 묘하게 믿음직한 면이 있는 남자들. 이 바닥에서는 그런 사람이 오히려 더 쓸모가 있다고 수긍하는 눈치를 보였다.

 

일단 한 달 일해보고 실력을 보겠습니다. 급여는 그때 정하죠. 어떻습니까?”

“...”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쉰 이강철은 표정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한 것이었다. 이내 밝은 표정으로 미소를 지은 강철은 머리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럼 내일부터 시작하세요. 오전 열 시까지 나오시고.”

알겠습니다.”

 

짧은 대화였지만, 이강철은 미치코의 눈에서 뭔가 다른 것을 읽을 수 있었다. 단순한 식당 사장이 아니라는 직감이 스친 거였다. 그녀 역시 어떤 비밀을 안고 있는 듯한 기묘한 느낌이 있는 건 그동안 형사 생활에서 터득한 텔레파시 같은 것이었다.

 

...! 보통 여자가 아닌 거 같아...’

 

다음 날 아침, 이강철은 정확히 열 시에 미치코 식당에 도착했다. 어젯밤의 눈은 그쳤지만 차가운 공기는 여전했다. 식당 내부는 아침 햇살이 스며들어 어젯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미치코가 앞치마를 매며 인사했다. 그녀 뒤로는 한 명의 남자가 더 보였다. 오십 대 초반, 체격이 좋고 손에 칼자국이 여러 개 있는 전형적인 주방장 스타일이었다.

 

조빙수입니다. 여기 주방장을 맡고 있어요.”

이상철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은 악수를 주고받았다. 조빙수의 악력은 상당했다. 조리를 통한 수없이 단련된 손가락 힘을 과시라도 하는 걸까. 여하튼 그의 눈빛에서도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요리 좀 해봤다던데, 오늘 간단하게 테스트해볼게요.”

 

조빙수가 주방으로 안내했다. 깔끔하게 정리된 주방에는 각종 칼과 조리기구들이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이강철은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주방이었지만,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간단한 일식 요리 하나 만들어보세요. 재료는 마음대로 쓰시고. 초밥만은 제외하고...”

 

이강철은 냉장고를 열어 재료들을 살펴보았다. 신선한 생선, 각종 채소, 조미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잠시 고민한 후에 연어와 아보카도, 오이를 꺼내 들었다.

 

, 재료는 신선하군...!’

 

칼을 잡는 순간, 그의 손동작이 달라졌다. 전국 요리 경연대회에서 여러 번 입상한 경력이 있는 그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실력을 적당히 감춰야 하는 것이었다. 너무 뛰어나면 의심받을 수 있었다. 적당히, 아주 적당히... 정확하지만 화려하지 않게, 능숙하지만 완벽하지 않게. 이강철은 절묘한 균형을 맞춰가며 연어 아보카도 롤을 만들기 시작했다.

 

!!...!!”

 

칼질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주방에 울려 퍼졌다. 조빙수는 그의 손동작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기본기는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뭔가 어색한 면도 있었다. 고의로 서툰 척하는 행동이 자기보다 한 수 아래로 보이려는 의도로 볼 수밖에 없었다.

 

됐습니다.”

 

이강철이 완성된 요리를 내놓았다. 조빙수가 입맛을 보더니 예리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네요. 일단 보조부터 시작하시죠.”

 

두 번째 시험을 통과했다. 이강철은 안도하며 앞치마를 매었다. 오후가 되자 손님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의 미치코 식당은 생각보다 바빴다. 회사원들, 대학생들, 그리고 몇몇 수상해 보이는 사람들까지 다양한 고객층이 찾아왔다.

 

바쁘네, 바빠...’

 

이강철은 조빙수의 지시에 따라 재료 손질과 간단한 조리를 담당했다. 그의 눈은 주방일에 집중하는 척하면서도 끊임없이 주변과 홀을 관찰하고 있었다. 미치코와 특별한 손님들 사이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일본어로 나누는 대화 중 몇몇 단어들이 그의 주의를 끌었다. 상하이, 화물, 일정... 모두 수사와 관련될 수 있는 키워드들이었다.

 

이상철 씨!”

 

미치코의 부름에 이강철은 고개를 들었다. 큰일 날뻔했다. 가명을 잘못 기억한 게 아니라 습관적으로 이강철은 이상철이라는 이름에 반응이 늦어버린 것이었다.

 

, !”

홀에 쇼우 좀 가져다주세요.”

알겠습니다.”

 

타마리 간장을 들고 홀로 나간 이강철은 자연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구석 테이블에 앉은 두 남자가 눈에 띄었다. 한 명은 중국계로 보이는 사십 대 남자, 다른 한 명은 한국인이었다. 그들의 두런거리는 대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다음 주 화요일에 부산항으로...”

“...방 오야분이 직접 오신다니...”

 

이강철의 심장이 빨라졌다. 방이라는 말은 분명 방칠두를 가리키는 거 같았다. 하지만 다음 말소리가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일부러 뒤로 물러섰다. 너무 오래 머물면 의심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깨진 조각을 퍼즐 맞추듯이 가는 게 정상이었다. 주방으로 돌아간 이강철은 계속해서 일에 집중하는 척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눈과 머릿속에서는 그들의 특징들이 쉴새 없이 입력되고 있었다.

 

수상함이 직관적으로 느껴져...’

 

저녁 시간이 되자 식당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점심때와는 다른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장을 입은 중년 남성들, 비싼 옷을 입은 여성들, 그리고 몇몇 명백히 조직원으로 보이는 사람들까지. 미치코의 표정도 달라졌다. 낮의 상냥한 식당 사장에서 어딘지 모르게 날카로운 기운을 풍기는 여성으로 변했다. 그녀가 특별한 손님들과 나누는 대화는 대부분 일본어였고, 때로는 중국어도 섞여 있었다.

 

, 일본어, 중국어를 자유자재로 하다니...’

 

접시 설거지에 눈을 떼지 않은 이강철은 귀를 홀 방향으로 기울였다. 그의 외국어 실력은 상당한 편이었다. 경찰 특수 훈련 과정에서 중국어와 일본어를 집중적으로 배운 덕분이었다. 현지 어학 훈련이 필수였지만 그는 어학연수를 가지 않고도 무사히 국제수사과 근무에 합격한 요원이었다.

 

“...상하이에서 연락이 왔어. 계획에 변경이 있다고 그러더라.”

언제부터?”

다음 주부터. 더 조심해야 할 것 같아.”

 

미치코와 한 남자가 나누는 대화였다. 이강철은 설거지하는 손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집중해서 들었다.

 

새로 온 주방 보조는 어때?”

아직 뭐라고 말하기엔... 하지만 별문제는 없어 보여.”

 

이강철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자신에 관한 이야기였다. 아직은 의심받지 않고 있는 것 같았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시간이 흘러 저녁 영업이 끝날 무렵, 한 명의 특별한 손님이 들어왔다. 오십 대 초반의 남자로, 고급 양복을 입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위험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장팔수입니다.”

 

그 남자가 미치코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이강철은 그 이름을 기억했다. 사전 브리핑에서 들었던 부산 유흥업소 상인회의 대표격 인물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장 사장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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