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 소설 아카이브 21회 - 나는 혼자가 되었다. 제7화 무인도의 현실 (2)


 

문득 아내가 차려주던 따뜻한 밥상이 떠올랐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된장찌개, 고소한 김치찌개, 정성스럽게 구운 생선... 그 모든 것들이 지금은 꿈같이 느껴졌다. 해변을 돌다 깨진 통발을 발견했을 때, 그는 몸보다 마음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철망은 녹이 슬었으나 여전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남방주는 그 철망을 접어 작은 바구니로 만들었다.

그 바구니를 처음 움켜쥐는 순간, 두려움이 잠깐 뒷걸음쳤다. 도구를 가진 인간이라는 사실이 한 줄기 따뜻한 안도감이 가슴 속에서 올라왔다.

 

그래, 나는 인간이야. 동물들과는 다르다. 도구를 만들 수 있고, 생각할 수 있어...’

 

바다를 등지고 섬 안쪽으로 향할 때, 불안은 아직 등을 떠밀었지만, 발걸음엔 분명 목적이 있었다. 섬 중앙으로 갈수록 바람에서 소금기가 빠지고, 낯선 숲 냄새가 피어났다. 잎사귀 깊은 곳에 갇힌 수분과 썩어 가는 낙엽의 단내, 그리고 송진의 쓴 향. 도시에선 맡아 본 적 없는 냄새였다. 그러나 후각은 빠르게 적응했다.

 

이 냄새는 완전 자연 숲이야...”

 

비로소 남방주는 자연과 처음 손을 잡는 느낌을 들었다. 주저 없이, 계획 없이, 피부로 부딪치는 만남이었다. 나무 하나를 손으로 두드리고, 껍질에 손톱을 넣어봐서 습기를 가늠했다. 송진이 흐르는 상처가 많은 나무는 불쏘시개에 알맞다. 그는 녹슨 양철 캔 뚜껑으로 껍질을 얇게 긁어 송진 덩어리를 모았다. 손가락에 끈적함이 묻었다. 그 끈적임을 문질러 떼어내는 사이, 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만질 수 있다는 사실이 천천히, 그러나 날카롭게 뇌리에 새겨졌다.

 

그래, 송진으로 밤에 불을 밝힐 수도 있지...’

 

그때 어깨 위로 빗방울처럼 사소한 생각 하나가 떨어졌다. 우연히 다가온 그 몸서리에 남방주는 다시 생각했다.

 

공포는 곧 감각이다. 감각은 계획을 낳는다. 계획을 밀고 가는 힘은 생존 본능이다.”

 

생각은 짧았지만, 뿌리 깊은 확신이 뒤따랐다. 그는 그 확신을 심장 밑바닥에 묶어 두었다. 하지만 확신도 잠깐, 다시 현실이 밀려왔다. 혼자라는 사실. 도움을 청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 언제 구조될지 모른다는 사실.

 

만약... 만약에 내가 구조되지 않는다면...?’

 

상상하기조차 싫은 생각이었지만, 피할 수 없었다. 이 섬에서 평생을 보내야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가족을 다시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숲속을 걸으며 남방주의 마음은 자꾸 집으로 향했다. 지금쯤 아내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남영호 침몰 소식을 들었을까. 얼마나 걱정하고 있을까...

 

여보, 미안해... 낚시 가지 말라고 했는데... 그 말을 들었으면...’

 

아내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조심해서 다녀와...!”

 

그 평범한 인사가 이제는 마지막 말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감슴 한켠이 시어진 남방주는 딸의 얼굴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중학교 2학년인 딸은 요즘 사춘기라 아빠와 말도 잘 안 했다. 그런 딸이 지금은 아빠를 그리워하고 있을까. 아니면 여전히 무관심할까.

 

아빠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면... 그제서야 소중함을 깨달을까...? 아니야, 내 딸은 속마음을 감추려고 퉁명스럽게 위장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야... 사춘기는 으레 진실함을 감추려고 하지. 나도 그랬으니까... 그 진실이 너무 소중하니까 꼭꼭 숨겨두는 거야, 내 딸... ...!’

 

가슴이 울컥하며 눈물이 찔끔 나왔다. 왠지 모르게 쏟아질 것 같았지만 참았다. 눈물을 흘릴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살아서 돌아가는 것만이 가족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꼭 돌아갈 거야. 꼭 살아서 돌아가서 딸한테 미안하다고 말할 거야. 아내한테도... 걱정 끼쳐서 미안하다고...’

 

그 다짐이 발걸음에 힘을 실어주었다.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정오 가까이, 그는 다시 해안으로 나와 섬 바깥을 손끝으로 잰 듯 걸었다. 지형은 굽었고, 갯바위는 칼날처럼 파였다. 간간이 모래톱이 나타났다가, 다시 절벽이 입구를 막았다. 걸음마다 여기가 탈출구인가, 아니면 막다른 길인가를 본능적으로 저울질했다. 언덕 가장 높은 곳에 서자, 바다의 푸름이 천창처럼 머리 위로 터졌다. 그리고 동시에 그 거대한 푸름이 자신에게는 경계 없는 감옥임을 깨달았다.

 

... 수평선 밖에 보이지 않아...”

 

사방이 바다였다. 끝없는 바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에 육지가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바다. 절망감이 밀려왔다.

 

내가 여기서 나갈 수 있을까? 정말로...?’

 

그는 숨을 길게 뱉어냈다. 폐 속 공기가 뜨겁게 솟구쳤지만 바로 식었다. 하지만 두려움은 다시 말로 떠오르지 않았다. 말이 필요 없이, 심장은 이미 판단을 내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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